[이기우] ‘밤에 피는 꽃’ 이기우, 20년 동안 열지 않은 페이지를 용감하게 열어보다[스경X인터뷰]

태초에 차승원이 있었다. 모델을 하다 배우를 겸업하며 큰 획을 그은 그의 뒤에는 마치 런웨이에서 앞사람의 발자취를 따라가듯 뒤를 따르는 이들이 생겼다. 연기를 하며 런웨이를 서던 차승원을 동경의 눈빛으로 보던, 이를테면 이기우 같은 배우들이다.

이제 이기우도 20년을 지나, 마음속으로 연기의 꿈을 품고 있는 후배들이 동경할만한 위치에 섰다. 동경이나 존경은 그저 세월만 지났다고 해서 생기는 것은 아니다. 부단한 노력과 발전 끝에 마음을 흔드는 연기를 했을 때 주어진다. 이기우는 그런 면에서는 계속 도전하는 배우 중 하나다.

그런 그가 최근 막을 내린 MBC 드라마 ‘밤에 피는 꽃’을 통해 큰 변곡점을 맞았다. 스스로 하지 못하던 ‘사극’ 장르에 도전해 새로운 지평을 맛봤기 때문이다. 사실 사극을 안 했던, 아니 못했던 것은 큰 이유 때문이 아니었다. 

“제가 데뷔하던 2000년대 초반만 해도 지금과 분위기가 달랐어요. 지금은 카메라도 다 작아졌지만, 그 당시에는 카메라도 컸죠. 키가 커서 사극을 못 하겠다는 이야기도 있었고, 저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아요. 키 큰 배우에게 제약이 있는 생태계였죠.”

하지만 그는 변화에 대한 오랜 다짐을 실천하는 방안으로 사극을 택했다. 그리고 ‘밤에 피는 꽃’에서 승정원 좌부승지, 요즘으로 따지면 대통령실 국가안보실장 정도 되는 직급의 인물 박윤학을 연기했다. 사극은 정말 ‘신세계’였다.

“이 작품에 대한 모든 것이 제 머릿속 ‘첫 기억’이라는 폴더에 저장된 것 같아요. 의복도 제 키에 맞춰 기성복이 아닌 것들을 제작해야 했고, 버선이나 갓 그리고 상투 등 당시복색을 챙기는 것도 신기했어요. 그리고 머리나 분장을 하는 것도 따로 하지 않아요. 촬영현장에 민얼굴로 도착해서 배우들이 한꺼번에 변신하죠.” 

무엇보다 사극 현장에서만 줄 수 있는 특유의 ‘여유’가 한몫했다. 보통 지방 야외세트촬영이 잦은 사극은 일단 몰입해서 찍을 수 있는 환경도 있지만, 준비에 시간이 오래 걸려 대기시간이 길다. 날씨가 안 좋아져도 그렇다. 비가 오면 한옥세트에 걸터앉아 비가 그칠 때까지 다리를 흔들며 기다리는 재미도 있었다.

“대사를 잡는 과정도 재미있었어요. 아내가 도움을 많이 줬는데요. 특별한 정도는 아니지만, 학생 때 연극반 활동을 했었어요. 무대 경험이 있고, 대사를 이해하는 정도가 제게 도움이 될 여지가 있어 도움을 받았죠. 아내가 도와줬던 작품이 ‘나의 해방일지’나 ‘밤에 피는 꽃’ 등이었는데 다 잘되고 있으니, 앞으로도 많이 도움을 청해야겠습니다.”(웃음)

박윤학은 임금 이소(허정도)에게는 신하의 모습을, 동생 박수호(이종원)에게는 아빠 같은 형의 모습을 보였다. 키다리 아저씨처럼 자상히 챙기는 모습을 보였던 연선(박세현)과의 관계에서는 차분한 이미지에 청량함을 주는 허당끼도 숨어있었다. 그는 “한 작품에서 여러 연기를 한 것 같아 좋았다”고 말했다. 

“상대역에 따라 연기톤을 바꿔야 하는 부분이 고민이었어요. 작품 장르 자체가 ‘코믹액션활극’이니까 저도 그 기조를 따르고 싶은데, 감독님께서 ‘너까지 그러면 안 된다’는 느낌이 있으셔서 아쉬웠죠. (박)세현이와의 연기는 17살 차이가 나는지 몰랐어요. 굳이 묻지도 않았고요. 서로 강아지를 좋아해서 공감대를 형성하고 촬영을 했었습니다.”

이하늬의 열정과 에너지, 이종원의 선량함과 순수함. 사극현장에서만 만날 수 있는 관록이 있는 연기자들의 향연. 이기우는 이러한 분위기를 체감하면서 아직도 더 성장해야 한다는 걸 느꼈다. 20년을 했다고 어느 경지에 올랐다는 과신은 하지 않는다. 이번 박윤학 역할을 하면서 ‘잘한다’고 평가해줬던 말들이 많았던 것도 그에게는 큰 힘이 됐다.

“개인적으로는 발성이나 목소리가 단점이라고 생각해 트레이닝도 하고 연습을 하고 있어요. 그리고 코로나19 유행 당시에 운동을 많이 못 해서 몸이 약해졌거든요. 이 부분도 단련하면서 언제 쓰임이 있을지 모르는 그 상황을 대비하고 있어요.” 

그가 아주 두꺼운 폰트와 크기로 “강조해달라”고 말한 부분이 있다. 이기우는 아직 최근 유행하고 있는 OTT 플랫폼에 나선 적은 없다. 이를 통해 도전할 배역이 많다고 생각하고 있다. 직업군인의 날카로움 그게 아니라면 실패한 운동선수의 안타까운 서사 그게 아니라면 허술한 느낌, 해보고 싶은 것이 많아졌다.

“이번 도전을 통해 계속 다른 환경에서 일하고, 여러 연기를 풀어내고 싶은 욕구가 생겼어요. 거기다 OTT 작품들은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볼 수 있잖아요. 저의 영역을 확장하는 데 도움을 줄 것 같습니다. 20년 동안 열지 않았던 ‘사극’이라는 페이지를 열었어요. 앞으로 여는 페이지 역시 실망스럽지 않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지켜봐 주세요.” 


출처 스포츠경향 하경헌 기자 https://entertain.naver.com/read?oid=144&aid=0000946763